인도영화팬들을 비롯해 발리우드 영화를 접하는 많은 이들이 가장 작품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감독은 산제이 릴라 반살리일 것입니다. '블랙'같은 영화는 비록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뒤에 개봉되었지만 성공을 거두었고, ‘사와리야’같은 작품이 국내에 출시되어 있기 때문이죠.

 또한, 아마 ‘내 이름은 칸’이 개봉되기 전까지 배우 샤룩 칸 하면 생각나는 영화는 ‘옴 샨티 옴’이나 ‘데브다스’같은 영화일 것입니다. 이처럼 산제이 릴라 반살리의 발리우드 영화계에서의 입지나 인도영화를 접하는 이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큰 편이겠죠.

 


 일전에 그의 영화세계를 다루던 리뷰에서 산제이 릴라 반살리에게 영화 ‘청원’의 의미는 새로운 도전이라고 언급했던 바 있습니다. 언제나 빛을 중심으로 한 미장센이나 웅장한 느낌을 주려하는 그의 귀족적 표현은 변함이 없지만 1년에 가까운 제작기간이 걸렸고, 리틱 로샨과 같은 배우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괴롭히면서 만든 하나의 미술품과 같은 영화죠.

 내러티브에 대해서는 크게 구애받지 않으려 하는 감독이긴 하지만 솔직히 영화 ‘청원’은 내러티브의 구조를 느끼면서 감상했습니다. 초현실적 느낌을 주려했던 촬영이나 유화적인 느낌을 주려한 요소들, 공들인 의상이나 세트에 대한 분석과 평가는 제 전공도 아닐뿐더러 미장센을 중점으로 보는 평론가적 자질을 가진 관객들의 몫으로 돌리는 게 좋을 것 같긴 합니다.

 그렇다고 한 편으로는 이 영화가 ‘안락사’라는 소재가 주는 감동스토리로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물론 내러티브를 중시하는(아니 내러티브라기보다는 내용을 중시하는) 관객들에겐 먹힐 수 있지만 제가 보기에 ‘청원’은 ‘블랙’이 그랬듯 감독이 자신의 가치관을 교묘히 아름다운 영상으로 주입시키려 하는 모습이 들어 그 정서적인 불순함을 느꼈기 때문이죠. 아, 그것은 제가 안락사를 반대한다는 뜻이 아니고 (웁쓰...) 반살리 감독이 세련된 영상을 다루는 만큼 뭔가 열린 사고나 열린 결말을 보여주는 사람일 거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사실 ‘감동’이라는 코드로 보면 영화 ‘청원’은 무엇을 감동받아야 할지 모르는 영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케팅에서는 이 영화를 한 남자의 권리를 위한 투쟁같이 그리겠지만 사실 뚜껑을 열어보면 관객들로 하여금 그런 감정을 끌어내려는 시도를 하기 보다는 의외로 결말부까지 천천히 그의 모습을 따라가는 하나의 모노드라마적 감성이 더 크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청원’이 좋았던 점은 바로 영화에서 보여지는 인간관계의 구조적인 변화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영향력을 그래프를 그리듯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화는 사고로 14년 동안을 얼굴만 움직이고 산 전직 마술사 에단의 이야기에서 시작됩니다. 사건의 시작이고 영화의 관계의 구도가 본격적으로 전환점을 이루는 단계니까요.

 



 에단이 ‘안락사’라는 거대한 폭탄을 터뜨리기 전에 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우선 14년 전, 마술사였을 때의 그는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스타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마치 우리가 TV의 스타들을 보듯 잘 알지는 못하지만 명성과 이미지 등의 요소 때문에 좋아하게 되는 사람이었죠.

 사고 후 그는 라디오 DJ를 시작하며 사람들에게 조금은 친화력 있는 존재로 다가옵니다. 그 단적인 예가 자살을 극복하고 한 아이의 아빠가 된 한 청취자의 이야기를 통해 나타나죠.


 하지만 안락사 문제가 불거지면서 에단은 지극히 이기적이고 자기방어적인 인물로 돌변합니다. 아니, 그게 그의 본성이었을 수도 있죠. 여하튼 안락사에 대한 청원을 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의 안락사에 대한 의견을 투표로 받습니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안락사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들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만약 에단이 민주적인 사람이었다면 그들의 의견을 수렴했겠지만 그의 표정이나 말투를 통해 그것은 형식적인 쇼였음이 드러납니다. 마지막에 자신을 응원해주는 옛 조수의 전화에 감동을 받으니까요.

 


 예전에 저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한 회원이 자신의 고민을 올린 글을 보았습니다. 그 분께서는
 카운슬링을 해 달라는 말을 하더군요.
 글을 읽어보고 나서 저는 있는 그대로 충고를 해 주었더니 그 분께서 대뜸 발끈하시더군요. 제가 뭘 잘못했을까 생각해보니 제 지인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 사람은 사실 카운슬링을 받고 싶은 게 아니고 자기편을 확인하고 위로를 받고 싶은 것이다.”
라고 하시더군요.

 


 에단의 안락사 이야기를 통해 에단은 잠시 동안 자신의 사회적 파장으로 연결된 ‘그저 자신을 아는 사람’ 정도와 교류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원치 않는 결과를 얻게 되자 에단은 자신의 이기적인 모습을 고수하고 철저히 혼자로 남게 되지요.

 하지만 자신의 편이 되어 주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그들과 부대끼면서 에단은 자신의 테두리에 있는 새로운 사회를 경험하게 됩니다. 비로소 스타와 팬이나 사회적인 파장을 불러오는 이슈메이커와 대중들의 관계를 철저히 버리고 자신만의 네트워크를 구축하게 된 것이죠.

 사실 이조차도 얼마나 많은 관객들이 긍정적으로 볼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현대의 전화기 속에 담긴, 트위터의 팔로워로 등록되어 있는, 실제로는 네트워크가 되지 못할 수많은 얽힌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볼 만합니다.

 그런 점에서 영화 ‘청원’은 사람과 사람에 대한 진정한 인간관계의 면모가 영화 속 사건들과 함께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넓지는 않지만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들...
 주인공 에단의 웃음은 그런 의미 아니었을까요.

“내가 헛살지는 않았구나...”하고 말이죠.





Posted by 라.즈.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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